가을의 전령, 선비의 품격
낮은 여전히 덥지만, 해가 지면 조금씩 달라지는 공기를 느낄 수 있다. 백로(白露), 이슬이 하얗게 맺히는 절기. 여름의 끝자락에서 가을의 전령을 기다리는 이 미묘한 시점에, 문득 떠오르는 향이 있다. 바로 우리가 같은 이름으로 만든 향, 백로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백로라는 이름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있다. 계절을 알리는 절기의 이름이자, 동시에 물가에 조용히 서서 때를 기다리는 백로처럼 절제된 선비 그 자체를 뜻하기도 한다. 이 이중적 의미가 우리가 만들고자 한 향의 정체성이었다.

박영숙 작가, 최순우 옛집
한 장의 사진에서 시작된 영감
백로를 만들게 된 건 한 장의 사진 때문이었다. 선비의 방을 담은 사진이었는데, 보는 순간 '이거다!' 싶었다. 사방탁자, 달항아리, 반닫이, 호롱이. 하나도 과하지 않고, 하나도 부족하지 않았다. 정말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은 느낌이었다. 그 이미지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조선의 미학을 향으로 담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계속 그런 생각이 들었다. 화려하지 않지만 품격 있고, 과장되지 않지만 깊이 있는 그런 향. 그 절제된 우아함 같은 걸 향수로 만들어보고 싶었다.
작업실로 돌아와서 그 사진을 프린트해 벽에 붙여놓고 매일 보았다. 아침마다 출근해서 그 사진을 바라보며 오늘은 어떤 원료로 이 느낌을 표현해볼까 고민했다. 처음엔 백단향으로 시작했다가, 너무 직접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다음엔 삼나무를 시도했지만, 뭔가 일본적인 느낌이 강했다. 그러다 문득 클라리 세이지와 미르 오일의 조합을 떠올렸다. 시향지에 찍어보니 그 단정함이 딱 선비의 방 같았다. 차분하면서도 맑은, 그런 느낌.

우리에게 익숙한 스파이시
향수 업계에서 스파이시라고 하면 늘 똑같다. 계피, 정향, 카다몸... 전부 서구 향신료들이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우리는 항상 남의 향신료로만 스파이시 노트를 표현해야 할까?
실제로 우리는 일년에 라면을 다섯 번도 안 먹지만, 김치는 직접 담가 먹을 정도로 요리에 진심이다. 그래서 어떤 고춧가루가 더 맛있나 비교해본 적도 있다. 물론 할머니와 엄마가 가져다주시는 고춧가루가 제일 맛있다.(고춧가루 카르텔은 역시) 그런데 이 고춧가루들을 비교하다 보니 각각이 가진 향의 뉘앙스가 달랐다. 특히 햇볕에 잘 말린 고추의 그 구수하고 부드러운 향. 매운맛보다는 깊은 풍미가 인상적이었다.
이걸 향기 노트로 표현하면 어떨까? 처음에는 말도 안되는 아이디어라고 여겼다. 고춧가루 향수라니. 하지만 작업실로 돌아와 수십 번의 실험 끝에 찾은 조합을 맡아보더니 깜짝 놀랐다. 갈바넘의 쌉싸름한 터치, eugenol의 은은한 스파이시함, 그리고 hedione, evernyl과 미르 오일의 절묘한 조화. 이 조합이 우리가 아는 고춧가루의 그 구수하고 부드러운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매콤함보다는 구수함을, 자극보다는 온기를 담은 우리만의 스파이시였다.


가을 하늘을 담고 싶었던 마음
백로에는 가을 하늘의 투명함도 담아야 했다. 그래서 탑노트는 청차에서 영감을 얻었다. 클라리 세이지와 미르 오일을 배합해서 만든 냄새가 굉장히 단정했다. 첫 향을 맡는 순간 가을 아침 공기 같다는 느낌이 든다. 실제로 백로 절기 무렵, 새벽에 일어나 창문을 열면 맡을 수 있는 그 서늘하면서도 맑은 공기. 아직 여름의 열기가 완전히 가시지 않았지만, 분명히 계절이 바뀌고 있음을 알려주는 그 특별한 순간의 공기를 담고 싶었다. 이 부분을 만들면서 가장 어려웠던 건 '차가움'과 '청량함'의 균형이었다. 너무 차가우면 겨울향이 되고, 너무 청량하면 여름향이 된다. 백로는 그 사이, 딱 변곡점에 있어야 했다.
조용한 공명, 깊어지는 매력
2024년 파리 메종&오브제에서 백로는 조용했지만 확실한 인상을 남겼다. 입춘이 프랑스인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받는 동안, 백로를 선택한 사람들은 조금 달랐다. 그들은 대부분 향에 대한 이해가 깊은 사람들이었고, 시간을 두고 천천히 향을 음미했다. 영국의 한 바이어는 더 세련되고 지적인 매력이 있다고 평가했고, 프랑스의 조향사는 동양적이지만 오리엔탈하지 않다는 흥미로운 표현을 썼다. 서구인들이 기대하는 그 뻔한 '오리엔탈'이 아닌, 진짜 동양의 절제미를 알아본 것이다. 최근 출시한 향이라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특히 일본과 싱가포르 고객들 사이에서 백로는 조용히 사랑받고 있다. 와비사비를 연상시킨다거나 동양의 미니멀리즘 같다는 평가를 받는다. 화려하고 강렬한 향들을 거쳐 결국 이런 절제된 향으로 돌아온 사람들, 마치 선비가 화려한 벼슬을 거쳐 결국 초야로 돌아가듯이 말이다.

시간이 빚어내는 향의 여정
솔직히 말하면 나는 입춘보다 백로를 더 좋아한다. 자주 사용하는 향이기도 하다. 아침에 뿌리면 하루 종일 나와 함께하면서도 전혀 부담스럽지 않다. 매일 아침 백로를 뿌리면서 드는 생각이 있다. 이 향은 나를 '덜어내는' 향이라는 것. 과한 것들을 빼고, 본질만 남기는 그런 느낌. 백로의 진짜 매력은 시간이 지나면서 드러난다. 처음의 맑고 시원한 느낌에서 시작해, 점차 따뜻한 스파이시함이 올라오고, 마지막엔 부드러운 머스크가 은은하게 남는다. 특히 3시간쯤 지났을 때가 인상적이다. 갈바넘과 에버닐, 미르가 만들어내는 그 구수한 스파이시함이 피부 위에서 은은하게 퍼진다. 계피 같은데 계피는 아니고, 뭔가 익숙한데 낯선 향. 그게 바로 우리가 의도한 한국적 스파이시함이다. 한 고객은 이 향이 살아있는 것 같다고 표현했다. 아침의 서늘함에서 시작해 한낮의 온기를 거쳐 저녁의 포근함으로 마무리되는, 하루의 온도 변화를 담은 향. 처음엔 차가워 보이지만 알고 보면 따뜻한 사람처럼.

계절의 변곡점, 선비의 품격
백로 절기는 더위가 한풀 꺾이고 진짜 가을이 시작되는 때다. 낮은 덥지만 밤에는 서늘한 바람이 부는, 그런 변곡점. 백로 향기도 마찬가지다. 첫 향은 맑고 시원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따뜻한 스파이시함이 감싸안는다. 실제로 백로를 선택하는 사람들을 보면 공통점이 있다. 조용하고 사려 깊으며, 자신을 과시하기보다는 내면의 충실함을 추구하는 사람들. 마치 옛 선비들처럼, 겉으로는 단아하지만 속으로는 뜨거운 신념을 품은 사람들이다. 선비의 방에서 받은 영감과 갓 빻은 고춧가루의 구수함, 그리고 높고 맑은 가을 하늘의 투명함. 이 모든 게 하나로 어우러진 향이 바로 백로다. 하지만 백로가 진정으로 전하고 싶은 건 향기 너머의 메시지다. 더 많이 가지려 하지 말고, 더 크게 보이려 하지 말고, 그저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충분하다는 것. 절제가 주는 여백의 아름다움, 그 안에서 발견하는 진정한 풍요로움.
나는 매년 백로 절기가 돌아올 때마다 이 향을 다시 꺼내들 것 같다. 그리고 생각할 것이다. 올해는 무엇을 덜어낼까. 무엇을 비워서 더 채울까. 백로라는 이름처럼, 물가에 조용히 서서 인내하며 때를 기다리는 그 모습. 화려한 공작이 아니어도, 작은 참새가 아니어도, 그저 자신만의 품격으로 존재하는 것.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은 향이지만, 그래서 더 특별한 것 같다. 백로를 아는 사람들만의 조용한 연대, 절제의 미학을 이해하는 사람들의 은밀한 시그니처.
가을이 오는 길목에서, 당신도 백로와 함께 잠시 멈춰 서보는 건 어떨까. 선비의 품격을 닮은 이 향이, 당신의 가을을 더욱 깊고 풍요롭게 만들어줄 것이다.
가을의 전령, 선비의 품격
낮은 여전히 덥지만, 해가 지면 조금씩 달라지는 공기를 느낄 수 있다. 백로(白露), 이슬이 하얗게 맺히는 절기. 여름의 끝자락에서 가을의 전령을 기다리는 이 미묘한 시점에, 문득 떠오르는 향이 있다. 바로 우리가 같은 이름으로 만든 향, 백로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백로라는 이름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있다. 계절을 알리는 절기의 이름이자, 동시에 물가에 조용히 서서 때를 기다리는 백로처럼 절제된 선비 그 자체를 뜻하기도 한다. 이 이중적 의미가 우리가 만들고자 한 향의 정체성이었다.
박영숙 작가, 최순우 옛집
한 장의 사진에서 시작된 영감
백로를 만들게 된 건 한 장의 사진 때문이었다. 선비의 방을 담은 사진이었는데, 보는 순간 '이거다!' 싶었다. 사방탁자, 달항아리, 반닫이, 호롱이. 하나도 과하지 않고, 하나도 부족하지 않았다. 정말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은 느낌이었다. 그 이미지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조선의 미학을 향으로 담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계속 그런 생각이 들었다. 화려하지 않지만 품격 있고, 과장되지 않지만 깊이 있는 그런 향. 그 절제된 우아함 같은 걸 향수로 만들어보고 싶었다.
작업실로 돌아와서 그 사진을 프린트해 벽에 붙여놓고 매일 보았다. 아침마다 출근해서 그 사진을 바라보며 오늘은 어떤 원료로 이 느낌을 표현해볼까 고민했다. 처음엔 백단향으로 시작했다가, 너무 직접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다음엔 삼나무를 시도했지만, 뭔가 일본적인 느낌이 강했다. 그러다 문득 클라리 세이지와 미르 오일의 조합을 떠올렸다. 시향지에 찍어보니 그 단정함이 딱 선비의 방 같았다. 차분하면서도 맑은, 그런 느낌.
우리에게 익숙한 스파이시
향수 업계에서 스파이시라고 하면 늘 똑같다. 계피, 정향, 카다몸... 전부 서구 향신료들이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우리는 항상 남의 향신료로만 스파이시 노트를 표현해야 할까?
실제로 우리는 일년에 라면을 다섯 번도 안 먹지만, 김치는 직접 담가 먹을 정도로 요리에 진심이다. 그래서 어떤 고춧가루가 더 맛있나 비교해본 적도 있다. 물론 할머니와 엄마가 가져다주시는 고춧가루가 제일 맛있다.(고춧가루 카르텔은 역시) 그런데 이 고춧가루들을 비교하다 보니 각각이 가진 향의 뉘앙스가 달랐다. 특히 햇볕에 잘 말린 고추의 그 구수하고 부드러운 향. 매운맛보다는 깊은 풍미가 인상적이었다.
이걸 향기 노트로 표현하면 어떨까? 처음에는 말도 안되는 아이디어라고 여겼다. 고춧가루 향수라니. 하지만 작업실로 돌아와 수십 번의 실험 끝에 찾은 조합을 맡아보더니 깜짝 놀랐다. 갈바넘의 쌉싸름한 터치, eugenol의 은은한 스파이시함, 그리고 hedione, evernyl과 미르 오일의 절묘한 조화. 이 조합이 우리가 아는 고춧가루의 그 구수하고 부드러운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매콤함보다는 구수함을, 자극보다는 온기를 담은 우리만의 스파이시였다.
가을 하늘을 담고 싶었던 마음
백로에는 가을 하늘의 투명함도 담아야 했다. 그래서 탑노트는 청차에서 영감을 얻었다. 클라리 세이지와 미르 오일을 배합해서 만든 냄새가 굉장히 단정했다. 첫 향을 맡는 순간 가을 아침 공기 같다는 느낌이 든다. 실제로 백로 절기 무렵, 새벽에 일어나 창문을 열면 맡을 수 있는 그 서늘하면서도 맑은 공기. 아직 여름의 열기가 완전히 가시지 않았지만, 분명히 계절이 바뀌고 있음을 알려주는 그 특별한 순간의 공기를 담고 싶었다. 이 부분을 만들면서 가장 어려웠던 건 '차가움'과 '청량함'의 균형이었다. 너무 차가우면 겨울향이 되고, 너무 청량하면 여름향이 된다. 백로는 그 사이, 딱 변곡점에 있어야 했다.
조용한 공명, 깊어지는 매력
2024년 파리 메종&오브제에서 백로는 조용했지만 확실한 인상을 남겼다. 입춘이 프랑스인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받는 동안, 백로를 선택한 사람들은 조금 달랐다. 그들은 대부분 향에 대한 이해가 깊은 사람들이었고, 시간을 두고 천천히 향을 음미했다. 영국의 한 바이어는 더 세련되고 지적인 매력이 있다고 평가했고, 프랑스의 조향사는 동양적이지만 오리엔탈하지 않다는 흥미로운 표현을 썼다. 서구인들이 기대하는 그 뻔한 '오리엔탈'이 아닌, 진짜 동양의 절제미를 알아본 것이다. 최근 출시한 향이라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특히 일본과 싱가포르 고객들 사이에서 백로는 조용히 사랑받고 있다. 와비사비를 연상시킨다거나 동양의 미니멀리즘 같다는 평가를 받는다. 화려하고 강렬한 향들을 거쳐 결국 이런 절제된 향으로 돌아온 사람들, 마치 선비가 화려한 벼슬을 거쳐 결국 초야로 돌아가듯이 말이다.
시간이 빚어내는 향의 여정
솔직히 말하면 나는 입춘보다 백로를 더 좋아한다. 자주 사용하는 향이기도 하다. 아침에 뿌리면 하루 종일 나와 함께하면서도 전혀 부담스럽지 않다. 매일 아침 백로를 뿌리면서 드는 생각이 있다. 이 향은 나를 '덜어내는' 향이라는 것. 과한 것들을 빼고, 본질만 남기는 그런 느낌. 백로의 진짜 매력은 시간이 지나면서 드러난다. 처음의 맑고 시원한 느낌에서 시작해, 점차 따뜻한 스파이시함이 올라오고, 마지막엔 부드러운 머스크가 은은하게 남는다. 특히 3시간쯤 지났을 때가 인상적이다. 갈바넘과 에버닐, 미르가 만들어내는 그 구수한 스파이시함이 피부 위에서 은은하게 퍼진다. 계피 같은데 계피는 아니고, 뭔가 익숙한데 낯선 향. 그게 바로 우리가 의도한 한국적 스파이시함이다. 한 고객은 이 향이 살아있는 것 같다고 표현했다. 아침의 서늘함에서 시작해 한낮의 온기를 거쳐 저녁의 포근함으로 마무리되는, 하루의 온도 변화를 담은 향. 처음엔 차가워 보이지만 알고 보면 따뜻한 사람처럼.
계절의 변곡점, 선비의 품격
백로 절기는 더위가 한풀 꺾이고 진짜 가을이 시작되는 때다. 낮은 덥지만 밤에는 서늘한 바람이 부는, 그런 변곡점. 백로 향기도 마찬가지다. 첫 향은 맑고 시원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따뜻한 스파이시함이 감싸안는다. 실제로 백로를 선택하는 사람들을 보면 공통점이 있다. 조용하고 사려 깊으며, 자신을 과시하기보다는 내면의 충실함을 추구하는 사람들. 마치 옛 선비들처럼, 겉으로는 단아하지만 속으로는 뜨거운 신념을 품은 사람들이다. 선비의 방에서 받은 영감과 갓 빻은 고춧가루의 구수함, 그리고 높고 맑은 가을 하늘의 투명함. 이 모든 게 하나로 어우러진 향이 바로 백로다. 하지만 백로가 진정으로 전하고 싶은 건 향기 너머의 메시지다. 더 많이 가지려 하지 말고, 더 크게 보이려 하지 말고, 그저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충분하다는 것. 절제가 주는 여백의 아름다움, 그 안에서 발견하는 진정한 풍요로움.
나는 매년 백로 절기가 돌아올 때마다 이 향을 다시 꺼내들 것 같다. 그리고 생각할 것이다. 올해는 무엇을 덜어낼까. 무엇을 비워서 더 채울까. 백로라는 이름처럼, 물가에 조용히 서서 인내하며 때를 기다리는 그 모습. 화려한 공작이 아니어도, 작은 참새가 아니어도, 그저 자신만의 품격으로 존재하는 것.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은 향이지만, 그래서 더 특별한 것 같다. 백로를 아는 사람들만의 조용한 연대, 절제의 미학을 이해하는 사람들의 은밀한 시그니처.
가을이 오는 길목에서, 당신도 백로와 함께 잠시 멈춰 서보는 건 어떨까. 선비의 품격을 닮은 이 향이, 당신의 가을을 더욱 깊고 풍요롭게 만들어줄 것이다.